전세 없앤다고 해결 될까? 한국 주택 임대차 제도의 상징인 ‘전세’가 무너지고 있다.
확정일자 건수 올해 급증 …월세 수요 늘며 가격도 쑥쑥
각종 전세 관련 지표가 경고음을 울리고, 시장 참여자들의 신뢰도 바닥으로 떨어졌다. 깡통전세, 역전세 등의 부정적 표현이 난무하고, 전세사기는 한국사회가 앓는 중병으로 자리 잡았다. 서민들이 써 내려간 ‘내 집 마련’ 신화의 핵심 도구가 어느새 부동산 시장을 왜곡하는 주범으로 손가락질받는 처지가 됐다. 그렇게 전세는 지금 존폐의 기로에 서 있다.
전세가 파생한 문제는 목숨을 앗아갈 정도로 심각하다. 그러나 본질은 허무할 만큼 단순하다. 계약 당사자 사이에 오가는 ‘보증금’. 이 목돈이 전세의 전부다. 상황을 복잡하게 만든 것은 돈을 둘러싼 행위자의 인식이다. 본인이 전세 거래를 체결하는 자리에 나온 임대인(집을 소유한 사람)이라고 상상해보자. 임차인(집을 빌리는 사람)에게 건네받은 그 돈은 ‘내 집을 빌려준 대가로 받은 돈’인가, 아니면 ‘임차인에게 무이자로 빌린 돈’인가. 반대로 이번에는 임차인이라고 상상해보자. 임대인에게 건네주는 그 돈은 ‘남의 집을 빌려 쓰는 대가로 지불한 돈’인가, ‘집을 담보로 임대인에게 빌려준 돈’인가.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전세 보증금에 대한 임대인과 임차인의 생각이 달라야 한다. 하지만 주택에 대한 수요가 공급을 초과하는 상황이 장기화하면서 보증금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집을 빌리고, 빌려주는 대가’로 사실상 합의됐다. 임대인이 갑의 위치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날이 갈수록 주택이 귀해지는 상황에서 이는 상식처럼 보였다. 그런데 이 합의에는 숨겨진 전제가 있다. 첫 번째는 집을 빌려 쓰는 대가로 지불한 보증금이 각종 수익활동에 쓰이는 것에 임차인도 동의한다는 점이다. 이 경우에도 보증금 원금만 보전되면 괜찮을 수 있다. 문제는 원금이 보전되고 있는지 확인할 방법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두 번째 전제가 중요하다. 최소한 같은 규모의 보증금으로 다음 임차인이 확보돼야 한다. 이 전제가 충족되면 임대인에게 건넨 보증금이 어디에서 어떻게 쓰이는지, 수익은 내고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없다. 마치 폭탄 돌리기와도 같다. 그럼에도 보증금을 맡기고 전세계약을 체결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부동산, 전셋값이 끊임없이 우상향했기 때문이다.
상황은 변했다. 부동산 가격이 내렸다. 전셋값도 덩달아 떨어지기 시작했다. 전세계약을 오로지 주택을 매개로 한 사용계약으로만 보는 관점에서는 더 나올 대책도 없다. 전셋값이 다시 올라서 새로운 임차인이 같은 규모의 보증금을 낼 수 있을 때까지 “그냥 그 집에서 더 살아라”고 하는 것이 사실상 유일한 대안이다. 전세를 ‘임대인에게 집을 담보로 빌려준 돈’이라고 관점을 바꾸려 해도 늦었다. 이미 그런 식의 계약은 은행이 임대인과의 금전 관계에서 선점했다. 집을 팔아도 은행이 먼저 상환받는다.
꼬일 대로 꼬인 문제를 풀 방법이 마땅치 않은 상황에서 “전세를 그냥 폐지해 버리자”는 말이 나왔다.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이 지난 5월 16일 취임 1주년 기자회견에서 “전세제도는 수명을 다한 것 아닌가”라는 발언이 촉발한 전세소멸론의 시작이다. 논란이 일자 원 장관은 “전세를 제거하려는 접근은 하지 않겠다”고 수습했다. 그러나 시장은 믿지 않는 분위기다.
지난 6월 5일 서울 영등포구에서 만난 부동산 중개인 A씨의 말이다. 전세와 관련한 각종 논란 이후 그가 현장에서 체감한 변화는 두 가지다. 하나는 ‘전세계약이 줄어든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임대인들이 정말 빠르게 대응한다’는 것이다. 그의 체감에는 모두 근거가 있다.
전세계약이 줄어드는 것을 두고 정부의 책임을 지목한 이유는 주택도시보증공사(HUG·허그)의 전세보증금반환보증 가입 요건 강화 때문이다. 전세사기로 인한 문제가 심각해지자 정부는 대책을 내놨다. 그 핵심이 허그를 통한 반환보증 가입 요건 강화다. 이른바 ‘126% 룰’이라고 불리는 이 대책은 주택가격 산정 시 공시가 적용 비율을 150%에서 140%로 강화한 데 이어, 전세가율(집값 대비 전셋값 비율)을 100% 이하에서 90% 이하로 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이에 따라 반환보증에 가입하려면 공시가의 126% 이하여야만 가능하다. 쉽게 말해, 전셋값을 낮춰야 반환보증에 가입시켜주겠다는 의미다. 그런데 여기서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이 전셋값이 내린다고 임차인이 집을 빌린 대가로 지급해야 할 돈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전세사기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 나온 대책은 목적과 별개로 두 가지 부수효과를 만들었다. 하나는 공시가의 126%가 시장에서는 일종의 ‘가격상한제’가 됐다는 점이다. 전세 보증금 반환 문제에 대한 공포가 극심한 상황에서 반환보증에 가입할 수 없는 매물은 선택받기 어렵다. 이에 따라 좋든, 싫든 허그 반환보증에 가입할 수 있는 가격이 해당 주택 전셋값의 최상단이 된다. 그러자 여기서 또 다른 부수효과가 파생한다. 임대인이 새로운 임차인을 구해도 최대로 받을 수 있는 전셋값이 공시가의 126%로 설정되며 이보다 높은 가격에 들어온 기존 임차인의 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하는 경우가 생겼다.
상황이 이렇게 된 근본 원인은 임대인이 임차인으로부터 받은 보증금을 상환가능하도록 안전하게 보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임을 져야 하는 임대인과 별개로 126% 룰이 보증금을 돌려받아야 하는 애꿎은 임차인도 불안에 떨게 하는 것은 문제다. 허그 반환보증의 설립 취지가 ‘임차인이 보증금을 안정적으로 돌려받게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허그 측 관계자는 “(반환보증 가입 요건 강화가) 시장에서 가격 상한제 비슷하게 갈지는 생각도 못 했다”며 “전세 시장이 몸통이면 보증은 꼬리인데, 꼬리가 몸통을 흔들어 버린 상황”이라고 말했다.
전세사기 폭풍이 휩쓸고 간 자리에는 그보다 더 광범위하고, 큰 문제가 남았다. 역전세 문제다. 한국은행이 발간하는 ‘6월 금융·경제 이슈 분석’에 따르면 지난 4월 기준 역전세 위험 가구는 102만6000가구다. 이는 전체 전세 가구의 52.4%에 달하는 수치다. 역전세 주택의 현재 전세금은 기존 보증금보다 7000만원 정도 낮은 것으로 조사됐다. 완벽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허그 반환보증 가입 요건에 걸려 기존 임차인의 전세 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하는 경우도 유사하다.
역전세 문제의 핵심은 임차인이 제때 보증금을 돌려받을 수 있느냐다. 전세를 끼고 집을 샀거나 다른 소비, 투자를 진행한 집주인은 “여력이 없다”며 난색을 표하고 있다. 그러자 정부는 임대인에 한해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완화를 검토하고 있다. 실제로 지난 6월 6일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 김주현 금융위원장,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경제·금융수장 비공개 회의를 갖고 역전세와 관련한 DSR 규제완화 문제를 논의했다. 복잡한 용어가 사용됐지만 핵심은 단순하다. 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하는 집주인에게 상환에 필요한 돈을 빌려주겠다는 것이다.
전세 없앤다고 해결 될까? 결국 임대차 3법을 없애고 싶은 것 아닌가?
전세에 대한 평가는 개개인이 처한 입장, 임대차를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달라진다. 주장의 강도에는 차이가 있지만 크게 보아 ‘전세가 한국 시장에서 여전히 유효하다’는 입장과 ‘전세는 소멸해야 한다’는 입장이 맞서 있다.
양극단에 있는 주장은 전세의 미래에 대해 내리는 명백히 다른 진단에 기초하지만, 각자의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에서는 서로 비슷한 이야기를 공유한다. 한국의 전세가 임대인의 자산형성 수단으로 이용된다거나 정부의 시장 개입에 대한 평가가 그렇다. 따라서 이들 주장의 공통점을 살피고, 나아가 차이까지 아우를 수 있다면 지금의 전세 시장에 대한 보다 정확한 안목을 기를 수 있다.
주간경향이 ‘전세유효론’과 ‘전세소멸론’을 주장하는 인물들을 각각 인터뷰하기로 결정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좀더 많은 이들의 동의를 얻고 있는 ‘전세유효론’에 대한 설명은 지난 6월 6일 서울 중구에 있는 한 출판사에서 이광수 ‘광수네 복덕방’ 대표를 만나 들었다. 국내 최장수 건설업 분야 애널리스트로 활약한 이 대표는 다수 저서를 통해 지속적으로 부동산 시장에 대한 전망을 내놓은 만큼 이를 설명할 적임자로 판단했다.
‘전세제도가 어떻게 될 것 같냐’는 물음에 그는 “용어부터 다시 봐야 한다. 전세는 ‘제도’가 아닌 ‘현상’이다”고 말했다. 왜 전세 시장이 정부의 인위적 개입으로 사라질 수 없는지가 그가 말한 ‘현상’이라는 한 단어로 보다 분명해졌다.
전셋값이 하락해도 문제가 없는 시스템을 갖출 생각을 해야 한다. 임대차 시장에서 정치의 최우선 목표는 주거 취약층의 보호다. 이 대전제 안에서 전세 보증금을 지켜줘야 한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공공임대주택을 늘리는 것이다. 현재 공공임대주택은 전체의 8% 정도다. 현저하게 낮다. 우량한 기업 임대를 늘리는 방향도 고민해볼 수 있다. 정말 정부가 전세를 없애고, 월세로 전환하고자 한다면 운영이득을 목적으로 하는 기업 임대 시장을 키웠어야 한다. 월세 형태의 임대료는 상한 설정 등을 통해 부담을 충분히 낮출 수 있다. 또 기업 임대 주택의 소유와 운영을 분리해 지나친 임대료 상승도 제어할 수 있다. 운영이득이 목적인 시장에서는 임차인을 안정적으로 유치하는 게 목적이기 때문에 주거불안 문제 해소를 기대할 수 있다. 지금처럼 기존 임차인을 빨리 내보내고 다음 임차인에게 더 높은 보증금을 받는 구조에서 벗어날 수 있다. 전세는 시장의 선택에 의해 자연스럽게 줄어드는 것이지 정부가 제도로 어쩔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위적 개입은 실패를 부른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